멍 때리기 최고의 포인트, Apsley Falls

2021. 3. 15. 19:36Trip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Sydney가 아닌 Brisbane에서 출발이다. 이번 일정은 금요일 퇴근 후, 자정쯤 출발해서 하이웨이가 아닌 내륙의 일반도로를 이용하여 Warwick, Glen Innes, Armidale, Walcha를 거쳐 Apsley Fall에 해 뜰 무렵에 도착, 서너 시간 천천히 둘러보고 Oxley Highway와 Pacific Highway를 이용해서 브리즈번으로 돌아온다는 깔끔하고 알찬, 완벽한 계획이었다. 적어도 계획만큼은….!


늘 항상 그렇지만 출발부터 꼬였다! Brisbane에서 Apsley Fall까지는 6시간 정도 걸리기 때문에 해뜰 무렵에 도착하려면 10~11시 정도, 늦어도 12시 전에는 출발했어야 하는데 뭉그적거리다 1시 30분을 넘어서 출발, 일출은 이미 글렀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주 경계선을 넘어가는 여행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하고 음악을 크게 틀고 달려갔는데 4시쯤 잠시 쉬려고 정차한 곳에서 하늘을 보니 별빛이 내린다, 하염없이.
이번에는 곁길로 새지 않고 목표를 향해 가열차게 달려가기로 맹세했었는데 이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런 별빛이 아닌가? 그래서 카메라를 꺼냈고,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을 확인하다 보니 졸렸고, 잠시 타이머를 맞춰놓고 눈을 붙였는데 눈을 뜨니 아침 9시.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이미 카메라를 꺼냈을 때부터 계획을 멀리 떠났고 의식의 흐름, 마음 가는 데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로 눈 비비고 일어나 출발해서 오후 1시쯤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주 경계선을 넘자마자 한시간이 앞당겨진다. 아~ 망할 서머타임. NSW주는 QLD주보다 한 시간이 빠르다. 그래서 결국 현지 시간으로 2시에 도착, 마음은 평온했으나 몸이 지쳐서 자연스레 자리 잡고 앉게 되는 평소에는 하지 않던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늙었다!
가장 좋은 포인트를 골라 앉아 폭포를 보니 지난 몇주간 내린 비 덕분인가? 폭포에 물이 제법 흐른다. 지난번에 왔을 때 물이 말라 없었는데 흐르는 물이 있다니! 반갑네! 반가운 마음에 잠시 멍하니 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 몇 년 사이에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똑같은 모습이라 이 또한 반가웠다. 반갑기는 한데 예전에 찍은 사진 하고 뭐가 다를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사진을 찍게 되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렇게 멍 때리다가, 사진을 찍다가 하면서 시간이 되어 돌아가려고 길을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번 여행은 이렇게 끝나는가 보다 생각 했었다! 주유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Oxley Highway를 타고 Pacific Highway로 가는 중간에 산이 하나 있고 그 산을 넘으면 길가에 민가가 한 서너채 모여 있는 마을이 나오는데 그곳에 슈퍼이면서  우체국이자 카페이며 주유소를 하는 가게가 하나 있다. 주변이 다 농장들이라 이 근방을 통틀어 최고의 중심가인 그런 곳인데 핸드폰 신호가 잡히지 않는 외진 곳이다. Apsley Fall에서 출발할 때 예상 주행 가능 거리가 120km로 나왔고 중간에 있는 주유소까지 거리는 80km였기에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간에 있는 산,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거의 두 시간 정도를 가야 하는 산인데 이 곳에서 예상 주행 가능 거리가 갑자기 뚝뚝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30km가 남았다고 나오기 시작했다.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했고 연료를 최대한 아끼기 위해 에어컨도 끄고 달렸다. 20km 남았다고 나올 때 산을 빠져나왔고 15km 남았을 때 주유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 이제 살았다고 생각하며 주유소 앞에 정차를 했는데 이런, 주유소가 문을 닫았다! 문 앞에 붙어 있는 타임테이블을 보니 토요일은 4시 반에 닫는다네! 내가 주유소에 도착한 시간이 6시. 나의 로드트립 역사상 최고로 망한 순간이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내일 문 여는 시간이 아침 6시 반, 어차피 15km 정도 남은 연료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12시간을 이 곳에서 버텨야 한다! 어려운 미션이지만 한국에서 직장생활 20여 년 동안 야근과 철야로 단련된 몸, 할 수 있다! 해 떨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무의미한 주변 지형 탐색으로 한두 시간, 가게 앞 벤치에서 멍 때리기 한두 시간, 낮에 찍어온 사진 정리로 한두 시간…  핸드폰 전파만 잡히는 곳이라면 구조 요청이라도 할 텐데!
차 안에서 자세를 두 번 정도 바꾸면서 밤을 보내고 새벽 5시반에 기상, 6시에 차를 주유기 앞에 대고 주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이 당황스러운 상황을 영어로 어떻게 말해야 하는 가를 생각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6시 10분쯤 주인이 도착, 나를 보더니 한 두번 겪는 일이 아니라는 표정으로 급하게 문만 따고 들어가 주유기부터 켜 주었다. 감격의 주유를 하고 고마운 마음에 음료수랑 아이스크림도 같이 계산하고 그 동네를 떠난 시간이 정확히 6시 반. 12시간 30분 만의 탈출이다. 


어이없는 이번 여행, 그래도 큰 수확은 최고의 멍 때리기 장소를 확인했다는 것이며 느낀 점은 혹시 모르니 베개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하나쯤 가지고 다니자는 것. 다 좋은데 차 안에서 자는 동안 목이 너무 불편했음.

 

youtu.be/nv2FsqaULOk

 

'Trip'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늬만 낚시  (0) 2021.04.27
Natural Bridge  (0) 2021.04.17
단순노숙형 로드트립  (0) 2021.01.20
조용한 마을, 조용한 일출  (0) 2021.01.12
포근한 그리고 쿨한 사이  (0) 2020.12.10